
시편 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January 1, 2026. SaturDevo
영어 성경을 함께 읽어가는 분들과 2025년 마지막 주 모임에서 같이 읽은 말씀은 시편 1편이었습니다. 사실 이 시편은 정초에 읽는 것이 더 어울릴것 같은 말씀이지만,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이 정초에 각자 읽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미리 읽었습니다.
시편 1편은 시편으로 들어가는 관문(Gateway)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번째 시이며 시편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세계를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고 분명하고 명확하게 이미지화 하고 있습니다. 미조리주St. Louis에는 유명한 큰Gateway Arch가 있습니다. 샌트루이스는 18세기 서부개척시대에 ‘Gateway to the west’로 알려졌었습니다. 미시시피 강가에 자리한 이 도시는 서부로 진출하고 탐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종 점검을 마치며 서부로 들어가는 요충지로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역사적 역할을 기념하기위하여 세워진 것이 그 거대한 아치라고 합니다. 시편 1편이 이 St. Louis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첫 맛을 느끼며, 시편으로 뛰어드는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1편은 악인의 세계관과 의인의 세계관을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세계관은 시편 전체를 통하여 분명하고 진한 선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처럼 헛갈리지 않습니다. 욥기처럼 당황스럽지 않습니다. 선과 악이 분명합니다. 시편 1편은 애매모호한 언어가 아닌 단도 직입적 언어로 의인과 악인의 두 인생길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2절은 복되지 않은 사람과 복된 사람을 구분합니다. 복은 행복이라는 말과 통합니다. 1절은 행복한 사람에서 제외되는 세종류의 행위를 언급합니다. 악인의 꾀를 쫓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선사람, 그리고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종류의 사람이지만, 타락의 진행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그리고 있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타락의 진행과 비슷합니다. 나선형처럼, 점점 더 죄악을 쌓으며 타락한 이스라엘이 종국에는 멸망할 수 뿐이 없었습니다. 시편1편은 개인적 타락의 진행입니다. 시편의 악인은 점점 깊어지는 타락끝에 멸망(Perish)합니다.
첫째는 ‘악인의 꾀를 따르’는 것입니다. ‘꾀’는 counsel/ advice 입니다. ‘따르다’라는 말을 영어 성경(ESV, NIV, KJV등)은 ‘walk’으로 번역해 놓았지만, 히브리어 ‘하락’의 번역으로 ‘follow’, ‘따르다’는 말이 여기서는 더 적당합니다. NLT는 맘에 들게 ‘follow the advice of the wicked’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즉, 이것이 실제적인 상황이라면, 선한 의도를 갖지 않은 사람의 조언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타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것은 행, 불행을 결정하는 중요한 실수입니다.
두째는 ‘죄인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어떤 ‘길에 섰다’는 말은 벌써 ‘어떤’ 사람이 된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어떤’사람이 된것입니다. 잘못 잡은 방향으로 따라간 사람은 죄인이 된 것입니다. 어느사이 죄값을 지불해야 할 사람이 된것입니다. “하락(הלך)”이 영향력을 함유하고 있고, “아마드(עמד)는 습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길에 선다는 말는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째는 ‘오만한 자의 자리’인데, 오만한 자가 영어로는 Scoffers, Mockers, deriders, ridiculers 입니다. MSG 버전은 ‘Smart-Mouth college’라는 재미있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잘났다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시작된 죄는 ‘오만한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죄인으로 자리를 굳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행복하고 형통한 삶을 누립니다. 의인은 세상적이며, 보기에 좋은 꾀를 쫓는 대신,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즐거워 합니다. ‘즐거워’한다는 말을 영어는 Delight 으로 쓰고 있습니다. 기쁨과 만족과 감사의 의미가 포함된 말입니다. ‘율법’하면 사람을 제한하고, 어거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아마도, 은혜를 강조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그런 의미를 갖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율법안에서 즐거워한다는 말에는 부담의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주야로 묵상한다(meditate)는 말은, 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행동하는 동적인 의미를 포함합니다. 히브리어로 하가(הגה ) 인데, 사자가 먹이를 앞에 놓고, ‘으르렁’거리는 소리의 의미와, 초식 동물이 먹이를 ‘되새김하여 씹’는 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삶에 에너지를 얻는 행위입니다.
3, 4절은 의인과 악인을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겨를 비교합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나무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안정된 위치를 말하면서도 나무의 유용성을 나태내고 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와 무성한 잎은, 다른 생물과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식품이 되고 심터가 되고, 안식처가 됩니다. 의인이 그러합니다. 그와 대비되는 겨는 바람에도 날리는 존재로 안정된 자리가 없고, 쓸모가 없는 물건입니다.
5,6절은 ‘그러므로’ 하며 결론을 맺습니다. 의인이 행하는 행위, 그들의 삶은 하나님이 알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습니다. 있는것은 하나님의 심판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지상교회에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습니다. 어떤때는 악인이 더 많은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지상교회에서는 의인속에 섞여 분간이 안되는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에는 발도 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알다(know)입니다. 이말은 창세기 3:5의 하나님이 미리 다 “아신다”는 의미의 말이고, 또한, 4:1에 ‘아담이 그의 아내 이브를 알게되매(Adam knew Eve his wife)”의 ‘알다’같은 단어입니다. 미리알뿐만 아니라 속속들이 다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의인과 악인은 이 세상에서 구별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각각의 끝도 구별되었음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46의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시편 일편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두 길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그 길의 시작점은 악인의 꾀를 따르느냐 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느냐로 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적인 지식의 충고도 좋지만, 하나님의 조언을 우선적으로 듣고 기뻐하는 복된 한해의 시작이 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