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길

시편 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January 1, 2026.  SaturDevo

영어 성경을 함께 읽어가는 분들과 2025년 마지막 주 모임에서 같이 읽은 말씀은 시편 1편이었습니다. 사실 이 시편은 정초에 읽는 것이 더 어울릴것 같은 말씀이지만,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이 정초에 각자 읽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미리 읽었습니다.

시편 1편은 시편으로 들어가는 관문(Gateway)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번째 시이며 시편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세계를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고 분명하고 명확하게  이미지화 하고 있습니다. 미조리주St. Louis에는 유명한 큰Gateway Arch가 있습니다. 샌트루이스는 18세기 서부개척시대에 ‘Gateway to the west’로 알려졌었습니다. 미시시피 강가에 자리한 이 도시는 서부로 진출하고 탐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종 점검을 마치며 서부로 들어가는 요충지로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역사적 역할을 기념하기위하여 세워진 것이 그 거대한 아치라고 합니다. 시편 1편이 이 St. Louis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첫 맛을 느끼며, 시편으로 뛰어드는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1편은 악인의 세계관과 의인의 세계관을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세계관은 시편 전체를 통하여 분명하고 진한 선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처럼 헛갈리지 않습니다. 욥기처럼 당황스럽지 않습니다. 선과 악이 분명합니다. 시편 1편은 애매모호한 언어가 아닌 단도 직입적 언어로 의인과 악인의 두 인생길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2절은 복되지 않은 사람과 복된 사람을 구분합니다. 복은 행복이라는 말과 통합니다. 1절은 행복한 사람에서 제외되는 세종류의 행위를 언급합니다. 악인의 꾀를 쫓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선사람, 그리고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종류의 사람이지만, 타락의 진행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그리고 있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타락의 진행과 비슷합니다. 나선형처럼, 점점 더 죄악을 쌓으며 타락한 이스라엘이 종국에는 멸망할 수 뿐이 없었습니다. 시편1편은 개인적 타락의 진행입니다. 시편의 악인은 점점 깊어지는 타락끝에 멸망(Perish)합니다.

첫째는 ‘악인의 꾀를 따르’는 것입니다. ‘꾀’는 counsel/ advice 입니다. ‘따르다’라는 말을 영어 성경(ESV, NIV, KJV등)은 ‘walk’으로 번역해 놓았지만, 히브리어 ‘하락’의 번역으로 ‘follow’, ‘따르다’는 말이 여기서는 더 적당합니다. NLT는 맘에 들게 ‘follow the advice of the wicked’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즉, 이것이 실제적인 상황이라면, 선한 의도를 갖지 않은 사람의 조언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타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것은 행, 불행을 결정하는 중요한 실수입니다.

두째는 ‘죄인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어떤 ‘길에 섰다’는 말은 벌써 ‘어떤’ 사람이 된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어떤’사람이 된것입니다. 잘못 잡은 방향으로 따라간 사람은 죄인이 된 것입니다. 어느사이 죄값을 지불해야 할 사람이 된것입니다. “하락(הלך)”이 영향력을 함유하고 있고, “아마드(עמד)는 습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길에 선다는 말는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째는 ‘오만한 자의 자리’인데, 오만한 자가 영어로는 Scoffers, Mockers, deriders, ridiculers 입니다. MSG 버전은 ‘Smart-Mouth college’라는 재미있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잘났다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시작된 죄는 ‘오만한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죄인으로 자리를 굳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행복하고 형통한 삶을 누립니다. 의인은 세상적이며, 보기에 좋은 꾀를 쫓는 대신,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즐거워 합니다. ‘즐거워’한다는 말을 영어는 Delight 으로 쓰고 있습니다. 기쁨과 만족과 감사의 의미가 포함된 말입니다. ‘율법’하면 사람을 제한하고, 어거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아마도, 은혜를 강조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그런 의미를 갖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율법안에서 즐거워한다는 말에는 부담의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주야로 묵상한다(meditate)는 말은,  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행동하는 동적인 의미를 포함합니다. 히브리어로 하가(הגה ) 인데, 사자가 먹이를 앞에 놓고, ‘으르렁’거리는 소리의 의미와, 초식 동물이 먹이를 ‘되새김하여 씹’는 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삶에 에너지를 얻는 행위입니다.

3, 4절은 의인과 악인을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겨를 비교합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나무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안정된 위치를 말하면서도 나무의 유용성을 나태내고 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와 무성한 잎은, 다른 생물과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식품이 되고 심터가 되고, 안식처가 됩니다. 의인이 그러합니다. 그와 대비되는 겨는 바람에도 날리는 존재로 안정된 자리가 없고, 쓸모가 없는 물건입니다.

5,6절은 ‘그러므로’ 하며 결론을 맺습니다. 의인이 행하는 행위, 그들의 삶은 하나님이 알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습니다. 있는것은 하나님의 심판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지상교회에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습니다. 어떤때는 악인이 더 많은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지상교회에서는 의인속에 섞여 분간이 안되는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에는 발도 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알다(know)입니다. 이말은 창세기 3:5의 하나님이 미리 다 “아신다”는 의미의 말이고, 또한, 4:1에 ‘아담이 그의 아내 이브를 알게되매(Adam knew Eve his wife)”의 ‘알다’같은 단어입니다. 미리알뿐만 아니라 속속들이 다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의인과 악인은 이 세상에서 구별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각각의 끝도 구별되었음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46의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시편 일편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두 길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그 길의 시작점은 악인의 꾀를 따르느냐 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느냐로 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적인 지식의 충고도 좋지만, 하나님의 조언을 우선적으로 듣고 기뻐하는 복된 한해의 시작이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누가 복음)-2

베드로전서 2:7-8.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December 24, 2025. SaturDevo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 보다는 누가복음에서 더 풍성하게 보여집니다. 그러나 두 복음서를 읽다보면, 얼핏 무엇인가 많이 엇갈리는 것 처럼 보입니다. 누가 복음에는 요셉에게 나타나는 천사는 없습니다. 동방박사와 헤롯 이야기도 없고, 이집트로 내려갔던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도 없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사실 말고는 두 탄생이야기의 공통점은 없어 보입니다. 마태복음이 플라톤적이라면, 누가복음은 아리스토텔레스적입니다. 마태복음은 신비스러우면서도 이성적이고 율법적인 반면, 누가복음은 옛날 이야기를 듣는듯한 동화적이고 실제적인 장면들입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두 복음서의 대상 독자가 틀리게 설정했기 때문에 나타난 저자의 의도가 작용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나심은 세례 요한과 나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에 대한 수태고지가 있고, 이어 예수님의 수태고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출생이 있고 예수님의 출생으로 이어집니다. 수태고지에 나타나는 천사는 가브리엘 천사입니다. 마태복음과 틀린 점이라면, 마태복음에서는 꿈에 나타나는 사자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나타나는데 반해 누가 복음에서는 마리아에게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에서 언급되지 않은 천사 또는 사자의 이름은 누가복음에 언급된 가브리엘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한국 성경 마태복음에는 천사를 ‘사자(the angel of the Lord)’로 번역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천사 가브리엘 (the angel Gabriel)’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천사가 실제로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나타났느냐, 아니면 마리아에게 나타났느냐하는 질문이 들게 됩니다. 무엇이 맞는 대답일까요?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이야기의 전면에 나타나서 행동하는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됩니다. 누가는 요셉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리아를 설명하는 구절,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눅1:27)와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눅2:4)하며 호적하러 가는 구절에서 요셉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곳은 나사렛이었습니다 (1:26, 2:4).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들이 나사렛에서 호적하러 왔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하고 살던 곳이라든가, 사자가 요셉에게 꿈에 알려준일 일어난 곳이 베들레헴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런 사건들이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쓰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자세히 읽다보면 혼란스럽고, 당황스럽습니다.

게다가, 누가복음 2:2절은 논쟁이 되는 구절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으려는 사람들의 생각을 더욱 흩틀고 있습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었던 때는 AD 6-12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가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목동들과 시므온과 안나를 만나는 성전에서의 정결예식을 마태복음은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고, 마태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헤롯과 동방박사들을 누가는 전혀 듣지도 못한 듯합니다. 이런 문제들이 Synoptic Problem (공관복음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접근하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를 공관 복음서라고 합니다. 공관 (Synoptic)의 의미는 ‘같이 바라 보다 (view together)’ 또는 ‘같은 점에서 전망하다(view at a common point)’입니다. 같은 사건인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고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같이 놓고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두세사람이 같은 사건을 보고 그 사건을 기록할때도, 서로 각각 틀리게 기록하는 경우를 봅니다. 일어난 사건은 하나인데 두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사람이 각각 그 사건을 다른 입장에서 기록해서이고 또 두 사람이 서로 그 사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린 딸에게 들려줄때의 이야기와 틴에이저인 아들에게 들려줄 때의 이야기가 틀릴수가 있습니다. 두 이야기가 모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지만 듣는 사람에게 맞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탄생이야기와 누가복음의 탄생이야기도 이와 같습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썼고, 누가는 이방인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두 이야기를 같이 나란히 놓고 본다면, 한 이야기에 분명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살았습니다. 나사렛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도 나타나고, 요셉에게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호적하는 일 때문에 임신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여관을 잡지못하여 마구간같은 곳에서 아기를 낳아 구유에 둡니다. 목동들이 한 밤중에 찾아오고, 예수님이 태어나는 별을 보고, 동방에서는 현자들이 여행을 시작합니다. 팔일만에 성전에서 정결예식도 하고, 얼마동안(2년정도)은 베들레헴에 머물렀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조상의 땅이기에 아마도 베들레헴에 자리를 잡을 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현자들은 헤롯을 만나고, 예물을 바치며 예수님을 예배한 현자들이 돌아가자, 천사는 다시 베들레헴에 있는 요셉에게 타나나서 이집트로 갈것을 이야기해주고, 헤롯은 두살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그후 헤롯이 죽자 천사의 말에 따라 유대로 다시 돌아오나, 아켈레오가 두려워 베들레헴을 포기하고 다시 나사렛으로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6-8)라고 적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 복음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가 서로 맞지 않는 것에 의문은 갖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동되어 미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볼때,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가 한 사건에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며,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

예수님의 탄생 (마태복음)-1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December 23, 2025. SaturDevo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 1:18-2장 마지막까지에 걸쳐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든 크리스찬들에게 친숙하지만 또한 여러가지 의문도 야기 시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다 보면 생각치도 않았던 질문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이글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음미해 보며, 어떤 의문이 들게 하는지, 그리고 그 의문들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써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18절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사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임신한 사실이 알려집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마리아와 조용히 이혼하여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할려고 합니다. 성경을 읽는 크리스천들에게 익히 알려진 내용입니다.

마태는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임신된 사실이 알려졌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알려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요셉에게만 알려졌는지, 몇몇 측근들에만 알려졌는지? 요셉이 그녀를 부끄럽게 하지 않기 위하여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동네 사람 모두에게 알려진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표현한 마태의 의도에 대한 의문입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사람이라는 표현인지, 마리아를 동정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인지? 알려진 사실은 분명히 다른 남자와 통정에 의한 임신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임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요셉이 의롭다는 말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마리아가 하나님의 여자로 취급하여 마리아를 하나님께 양보한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성령에 의한 임신을 믿지 못하고 오늘날 우리들 처럼 의심하였지만, 마리아를 불쌍히 여겨 가만히 끊을 려고 한 것일까요? 성경은 이런 것에 대한 의문을 분명하게 대답해 주지는 않습니다.

18-19절의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 납니다. 이것은 성경이 또는 하나님이 흔히 쓰시는 문제 해결 방법입니다. 천사가 꿈에 이야기해준 모든 것을 요셉은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임신에 관한 사건 뿐만 아니라, 태어날 아기의 존재와 그 미래까지 말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믿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의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추측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믿고 따르는 우리와 요셉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도 요셉만큼 의로운 사람이 많이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교훈이 말씀 속에서 크리스찬이 배울수 있는 교훈이라면, 성경을 쓴 마태의 의도는 예수님의 탄생이 오래전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이 방법은 마태가 쓰고 있는 예수님의 얘기가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것을 강조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은, ‘마리아와 요셉은 어디 살았지?’입니다. 누가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은 부분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나사렛에 살던 마리아와 요셉이 인구조사 때문에 그 곳에서  베들레헴로 여행하여 머물렀다고 하는데, 마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와 요셉은 어디서 왔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정혼하고, 임신하고 아기낳고 까지 일년 이상 그들이 태어난 이래 그곳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잠시 갈등하였지만 주의 사자의 간섭으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예수님을 낳고 특별한 일 없이 베들레헴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장은 예수님이 헤롯이 통치하는 동안에 태어나셨다는 것을 기록합니다. 이 이야기가 동방박사 이야기 입니다. 어느날, 별올 보고 동방에서 왔다는 현자라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마 2:2)고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말은 삽시간에 온 예루살렘에 펴졌을 것이고, 유대의 왕인 헤롯도 민감하게 받아들인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에돔인인 헤롯은 유대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유대인의 왕이 났다는 말에 대해 물었을 것입니다.  

헤롯의 질문이 독특합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마2:4). 헤롯은 ‘유대인의 왕’과 ‘그리스도’를 같은 뜻으로 알았을까? 마태는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 의도가 있는 질문인가, 그냥 기록하다가 그렇게 썼을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헤롯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었을까?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유대인의 왕이 났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했기에 미가서 5:2절의 베들레헴을 찾아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벌써 알았다는 것인데 그들의 반응은 기록되지 있지 않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이 메시야(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여기에서 필요한 내용이 아니라 생략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미가서 5:2절은 말씀의 성취를 강조하는 마태복음서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베들레헴을 알아낸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장소를 알려주며, ‘유대인의 왕’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지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2:7) 알아냅니다. 별이 나타났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은 평범한 부부에게서 난 예수님이 특별하게 간주되는 순간입니다. 헤롯은 그들에게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주어 자기도 가서 경배하겠다고 말하며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냅니다. 그런 그들은 앞에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2:9)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2:10)며 아기예수를 보고 세가지 보물을 선물하며 경배합니다. 그후 그들은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꿈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명의 동방박사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박사들 (Wise men)’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 “셋”은 없습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고, 정확히 알아가야 할 필요성을 실감합니다.  별은 왜 그들을 잘 인도하다가 예루살렘에서만 길를 잃게 만들었을까? 혹시 헤롯과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넣기 위한 문학적 기교는 아니었을까?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을 가정하고 상상하여 문제화 시키는 것을 성경을 바로 보는 자세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경을 ‘연의’라고 주장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동방박사들이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고, 헤롯은 그들이 자기에게 들르지 않고 돌아간 사실을 알게되며 분노합니다. 그래서 헤롯은 그들에게서 얻은 정보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베들레헴과 그 지경의 사내아이들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갈등도 꿈에 나타난 주의 천사 (하나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헤롯의 계획을 알려줌으로 애굽으로 도망감으로 해결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도 여지없이 마태는 예레미야를 인용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또, 주의 사자의 현몽으로 헤롯이 죽은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주고,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유대로 돌아지만, 헤롯을 이어 헤롯 만큼이나 잔인하고 사악한 ,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왕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됨을 말하고 그리고 또 여지없이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 말씀의 성취를 강조합니다.

이렇게 자세히 읽어보면, 여러가지 질문이 (특히 누가 복음의 이야기와 비교하여) 고개를 듭니다.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사건 사건 마다 갈등을 해결해 주는 것은 꿈에 나타나는 주의 사자 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건 사건의 이루어짐을 마태복음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측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태복음만 읽고 예수님의 탄생을 이해하려고 할때 우리를 어지럽히는 의문들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같이 보아야할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해하려고 할때, 누가 복음의 예수님 탄생 부분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의 말씀은 이런 부분에서도 떠오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마태의 가르침만 듣기 원한다면, 마태복음으로 충분하겠지만, 저자를 넘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뜻까지 듣기 위해서는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도 보시길 바랍니다. †

예수님과 여리고

누가복음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April 12, 2025. SaturDevo

여리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날 밤을 보낸 곳입니다 (눅19:5). 그러나 당시의 여리고는 예수님이 자리를 펴고 하루를 보내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여리고는 당시 헬라화된 도시였으며, 헤롯의 겨울 궁전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사막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도시였습니다. 마태, 마가 복음에서는 여리고를 떠나며 눈먼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해주는 일만 언급하며, 여리고에서의 사건을 간단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누가는 삭개오의 사건을 길게 언급하고, 그의 집에서 유숙하였다는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누가는 마태와 마가와 달리, 여리고로 들어가는 길에 장님을 고치십니다. 당시 여리고는 두곳이었다고 합니다. 구여리고와 신여리고로 삭게오의 집은 신 여리고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당시 최고의 현대식 호화주택에서 연회를 갖고, 난생 처음으로 최고의 호텔식 잠자리를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주석은 두곳의 여리고를 마태, 마가의 나오며 장님을 고쳤다는 것과, 들어가며 고쳤다는 누가의 주장이 일치한다고 설명합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향락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라스베가스 같은 곳에서 하룻밤을 지낼 생각을 하셨을까요? 물론 뽕나무 위에까지 올라가 예수님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삭개오를 만난것이 문학적 스토리를 이어가는 원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우연한 일로 볼 수 없습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이런 사건에서도 의미를 찾고 연관성을 상고해 볼때,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성장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가셔서 유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크게 세가지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수아의 여리고 정복입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에 첫 싸움은 여리고성 정복이었습니다. 철옹성으로 알려진 여리고 성이 공성전없이 무너져내리게 한 여호수아는 가나안 온땅의 정복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철옹성 여리고는 진멸되고 무너져 내리지만 그곳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라합과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여리고가 죄악의 도시였던것 처럼, 예수님 시대에도 여리고는 유대땅안에 있는 이방땅으로 부와 사치의 도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먼저 죄악의 전초 기지인 여리고로 뚜벅 뚜벅 걸어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죄인중에 죄인인 세리를 구원하십니다. 여호수아와 예수는 같은 의미의 이름입니다. 여리고에서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여호수아를 볼수 있고, 라합을 볼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승리를 확신으로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두번째는 여리고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한 곳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구불 구불하고 거칠고 울통불퉁한 유대광야의 길로 범죄가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은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레위인도 거룩한 제자장도 아니었습니다. 약하고 핍박받고 힘없는 사람의 이웃은 그와 함께 하여 주고, 그를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죄인의 친구 멸시받는 사람들의 이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가장 큰 계명 두가지를 말씀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눅10:27). 예수님은 이말씀에 덧 붙여,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12:31)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라는 큰 전투,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앞두고 여리고에서 이 계명을 말씀하시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실예를 기억나게 하십니다.

세째는 여리고는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곳입니다.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905 피트 낮은 곳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루살렘은 해발 2500 피트의 높이에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은 천미터 높이에 있는 곳입니다. 제일 높은 곳을 올라가시기 위하여 제일 낮은곳에서 제일 작은자을 만나시어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4-45). 예수님은 영적으로 눈먼자들이 눈을떠서 예수님이 이루실 일들을 보고 이해하고, 믿고 구원받으시길 원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라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여리고의 사역은 우연히 지나는 길에 이루어진 일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이 지난 삼년동안 하신일을 기억하게 하고, 다시한번 확신시키 주시는 의도된 가르침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24:32).†

세번째 고난과 죽음과 부활 예언

마가복음 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은 보통 세 부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갈릴리 사역과 도상사역과 예루살렘사역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3년으로 친다면, 그 삼년 대부분은 갈릴리지역에서 사역하셨고, 갈릴리로 부터 예루살렘까지 가는 시간을 많이 잡아 한주일정도, 또 예루사렘에서 행하신 한주정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번째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실때는예루살렘에 거의 와 가실때쯤 됩니다. 그런데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예언을 왜 세번이나 반복하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당시의 배경 상황을 되 집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분으로 생각되었는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지며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 막8:27, 눅9:18).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유대인들은 유대 고금의 명망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삼년을 온전히 사역하시며 행하신 예수님의 능력과 권능을 소문으로만 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시기와 멸시을 섞어 예수님을 위협적인 위험 인물로 보았습니다. 배움없는 시골 출신이라고 멸시하고, 그런 그가 기적을 행하며 군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으니 시기하고, 그가 폭동이라도 선동하면, 나라가 위태로워 질것이니 위험합니다. 그런 사람이 앞장서서(막10:32) 제자들과 군중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갈릴리에만 있다면, 무시하고 멸시하면 되겠지만,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다면,  위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권능을 보며 이스라엘이 고대하여 마지않던 메시야(그리스도)임을 확신합니다. 그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 어떤 방식이로든 이방세력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크냐 (막9:34, 눅9:46)하는 논쟁을 하고, 요한과 야고보는 청탁까지 넣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머리속에는 예수님이 왕이 되었을때, 누가 총리가 되고, 누가 무슨 장관이 될 것인가에만 모아져 있습니다. 그들의 그런 사고 방식에는 예수님이 하시는 고난과 죽음과 부활 예언은 결코 이해될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충성심을 내 보였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부터 큰 꾸지람을 듣고 난 후로는 두번 세번 하시는 그 예언에 대해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이해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째든 자신에게 맡겨지고 계획한 일을 진행 시켜 나가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 시키는데도 삼년이 걸렸는데, 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고, 또 부활해야 하는지을 이해시키려면 십년이 아니라 평생을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그들에게 세번에 걸쳐 얘기해 주는데 그쳤을 것입니다. 세번은 확신을 주는 숫자입니다. 삼세번입니다. 사무엘을 세번 부르십니다(삼상3:10). 사무엘을 부르는 소리가 하나님이심을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요나는 뱃속에서 삼일을 있습니다(욘 1:17).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삼일을 있으면 죽는다는 것을 모두가 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그렇게 삼일 밤낮을 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신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언을 세번이나 들었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삼일 후에 부활하셨을 때에서 그 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가 있는 계획이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 되게 하여,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태초의 창조 의도대로, 에덴동산 낙원에서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죽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위를 향한 타락, 앎을 얻으려는 욕망의 죄로 죽음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의도가 실패한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태초의 창조 의도를 획복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세번의 예언과 예루살렘으로 앞서 걷는 발걸음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두려하듯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걸림돌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지를 책망하는 꾸지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원초적 삶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을 내어주며 까지 우리를 하나님의 원래 창조 의도대로 회복시키려는 확신이며, 위대한 사랑입니다.†

부활절 2025년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증거하는 기념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번의 예언(foretelling)을 통하여 자신이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실것”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시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예수님이 죽으실때 까지도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 승천하시고 나서야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됩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을 언급하는 독특한 부활이며, 기독교의 핵심을 언급하는 복음, 즉 예수님의 존재와 행위를 요약하여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매해 고정된 기념일이 아니고 변동되는 기념일입니다. 매해 날짜가 변한다고 해서 임의로 정하는 것은 아니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유월절과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정한 법칙에 따라 정해집니다. 이 방법에 따르면, 부활절은 매해 춘분후, 만월후, 첫번째 오는 일요일이 됩니다. 부화절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춘분후에 오는 만월을 교회에서는 특별히 구별하여 Paschal full moon이라고 합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부활절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이 부활절을 정하는 법칙이 달라서가 아니라, 서방교회는 그레고리역을 사용하여 정하고, 동방교회는 율리우스역을 사용하여 정하기 때문에 그 날짜가 같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올해(2025년)의 부활절을 이 법칙대로 계산하여 정한다면, 춘분이 3월 21일이고, 그 후에 오는 만월(보름)이 4월 12일이고, 그 다음에 오는 첫번째 일요일은 4월 13일이 되어야 하는데, 달력에는 부활절을 4월 20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모든 교회가 부활절을 정하는 법칙에 맞지 않게 되었있는지 당연히 궁금하게 됩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모든 나라들이 같은 시간대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미국이 아침 열시일때 한국은 다음 날 자정이 됩니다. 이 시간의 차이는 4월 12일(토)의 몇시에 어디서 만월이 되느냐가 중요하게 됩니다.

그레고리역을 쓰는 미국 동부시간(EDT)으로 따진다면, 4월 12일 토요일, 8:22분 PM 에 만월이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당연히 미국 달력에는 만월(full moon)이 4월 12일로 표기 되어 있고, 부활절은 4월 13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한국으로 친다면, 4월 13일, 9시 22분 AM 이 될것입니다. 즉 한국에서의 만월은 4월 13일이 되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절은 4월 20일이 됩니다. 그러면 미국은 부활절이 4월 13일이고, 한국은 4월 20일입니다. 어디에 맞추어야 할까요? 그래서 세계 표준시인 그리니치 시간으로 계산하게 되는데 만월이 되는 시각이 그리니치 시간으로 4월 13일 1시 22분 AM(GMT)이 됩니다.

따라서, 4월 13일 (일요일)이 만월의 날이 되고, 그다음에 오는 첫번째 일요일은 20일이 되어, 2025년 부활절은 4월 20일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전세계는 어느 시간대를 사용하느냐에 상관없이 부활절로 지키게 됩니다.

이렇게 특이하게 미국달력에 따르면, 만월(Paschal full moon)후 첫번째 일요일이 두번째 일요일이 부활절이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 해에, 또 놀랍게도, 올(2025년)의 부활절은 동서방 교회가 같은 날인 4월 20일이 부활절이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전15:23).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표현합니다. 첫 열매를 거두었다는 말은, 그 첫 열매를 따라오게 되는 많은 열매가 있게 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그리스도가 되고, 따라오는 많은 열매들은 예수님을 믿는 많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과 소망이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천문력적으로 특별하고 동서방의 모든 교회가 같은 날 부활절을 기념하게 되는 귀한 2025년의 부활절이, 부활하사 지금도 살아계시어 우리의 삶 중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복음에 은혜를 체험하는 귀한 부활절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December 30, 2024. SaturDevo.

요한복음 19:30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직접화법으로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을 영어성경(ESV, NIV, NLT, KJV, NSBN 등)에는 “It is finished”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한국말로 번역한다면, “끝났다”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다 이루었다”로 번역한 것을 보고, 이것이 제대로 번역된 것인지를 묻는 분이 있었습니다. 별로 신경쓰지 않고 읽었던 구절에 대한 이런 질문에 황당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고려한다면, 정말 잘된 번역인데, 영어 성경으로 성경을 읽는 분이라면, 분명히 “다 이루었다”라는 말로는 이해하지 못할 수 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NET 성경은 finished 라는 단어 대신, completed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MSG는 “It’s done… completed”로 다소 길지만, 더 분명히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Τετέλεσται (τελέω)는 finish, end, complete, pay 등의 의미를 갖는데, 여기서는 pay의 의미로 쓰이는 것이 제일 적합하다고 주석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It is paid 가 됩니다.

죄 없는 사람이신 예수님은 택함받은 자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값을 지불하신 죄가 다시 처벌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어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일어날수 없는 일입니다. 죄는 대속자나 죄인 당사자에 의해 한 번만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이상, 일사 부재리의 원칙은 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끝났다라는 선포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사역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이것에 촛점을 맞추어 한국 성경은 “다 이루었다”라고 아름다운 번역을 한것이라고 믿어 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이 사명을 띄고 이 땅에 오시어 임무를 완수하신 것에 자랑스러워서, 다 이루었다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그 촛점을 우리 부족한 죄인들에게 맞추시어, 다 지불했다, 또는 너희의 죄는 더 이상 없다라는 뜻에서, 끝났다(It is finished)라는 것을 선포하셨을 줄 믿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끝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모든 묵은 때와 죄악을 털어내고, 새 삶을 시작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2024년을 보내며,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을 다시한번 기억합니다. It is finished. 끝은, 곧 또 다른 시작입니다. 그 말씀은 새로운 한해, 2025년을 새롭게 시작하는 능력이 되며, 의미 있는 시작점이 될 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능력으로 깨끗한 양심을 지키며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는 신실한 새 삶의 첫 걸음이 되길 기도합니다.†

크리스마스;  예수님은, 정말 12월 25일에 태어 나셨나?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 (ESV))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December 20, 2024. SaturDevo

12월 25일은 예수님의 태어나신 날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알고 있고, 그 사실을 축하하는 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한 사실에 대하여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날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만, 몇일 날 태어났느냐는 문제 삼고 있지 않은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에 대하여는 주측과 주장이 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마가 고대 이방인들이 일년 중 밤이 제일 긴 동지를  기억하며 축제로 지켜왔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이방의 축제를 기독교가 예수님의 태어나신 크리스마스로 대치하며 기독교의 성일로 만들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연히도, 이방인들이 즐겼던 이유가 일년중 밤이 제일 긴 동지를 지나며 점점 해가 길어지는 날들을 기다리며 소망을 가졌다는 것과, 예수님이 구원의 소망의 빛으로 오셨다는 의미가 일치하며 그럴듯한 논리와 주장으로 받아 들여 지기도 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 하나는,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나신날을 동지 (12/21 or 22)로 하지 않고 25일로 했느냐?’ 는 것입니다.

2세기 말, 3세기초에 살았던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Sextus Julius Africanus, )는 예루살렘에 살았던 역사학자입니다. 그는 “세계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ld)”라는 글을 남겼는데, 이 자료에서 그는 “예수님의 수태일이 5501년(히브리역) 춘분인 3월 21일” 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내가 아는 동료중에 한 분으로 부터 자신이 어렸을때 자신의 할머니로 부터 할머니가 노예로 살던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미국 흑인들에게도 ‘노예’라는 말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시대에 들은 오래된 이야기를 ‘노예’의 삶을 격었던 사람에게서 그의 손녀를 통하여 생생하게 전해들은 이야기 였다는 것입니다. 2세기 말을 살았던 아프리카누스라면 할머니나 아버지를 통하여 직접적이고 생생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인 동시에 여러가지 문헌을 연구한 역사학자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주장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그의 기록에 의거하여 9년 뒤인 336년, 로마교회는 3월 21일 부터 온전한 사람의 수태기일인 280일 후인12월 25일에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9년 뒤에 (345년) 교황 율리우스 1세는 12월 25일을 예수님이 나신 크리스마스로 공표하게 됩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는 이방 축제를 차도용한 성일이 아니라, 초기 역사학자의 사실과 연구에 근거한 축제 성일인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크리스마스도 매년 우리는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기억하며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 귀중한 날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성경이 예수님의 태어나심에 중요한 의미을 두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성경은 구절은 마태복음 1-2장과 누가 복음1-2장, 그리고 요한복음 1장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고 요한 복음은 그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마리아와 다윗의 자손 요셉의 관계, 성령으로 수태한 마리아, 나사렛을 살던 마리아가 어떻게 베들레헴에 오게 되었으며 그곳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낮은 자로써 태어나신 예수님과 그의 태어남과 관련된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에게 일어났던 기이한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1장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태어나심의 의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태초에”라는 말은 창세기를 생각나게 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시간까지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말씀”은 그때 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하나님 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창조 행위의 중요한 행위자였음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1장 14절은 이 “말씀”이 독생자 예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사람이시다 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역시 14절은 그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가운데 거하신다라고 하며, 사람으로써의 예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 280일 만에 태어나는 아기로써 언급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서술을 통하여도 알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 두가지 사실은 100% 하나님이시며, 100% 사람이신 예수님이 (Hypostatic Union)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죄없는 사람이 됨을 말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죄없는 사람이 없음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롬3:10).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시기에 죄없는 사람이 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는것 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온전한 사람이시지만, 죄는 없으신 사람이 됩니다 (히 4:15). 그리고 죄 없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져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 없는 사람인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기에, 우리는 대신 죄 없는 사람이 된것이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요 1:12).

예수님의 탄생의 귀중한 의미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다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제자는…

누가복음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August 31, 2024. SaturDevo

여기서 “무리”는 제자들이 분명합니다. 17절 부터의 문장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 이라든가, 제자들”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무리”라고 번역 했는지 성경번역한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보통 “무리”라고 번역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일컬을때 사용한 용어였습니다 (예, 18절).

그러나 여기서 “무리”를 제자들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일컽는 말이라면, 22절에서 문장이 끝나고, 23절부터 새로운 문장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제자가 되려면”을 가르친다는 말이 어색한 말이 될수 뿐이 없다는 점을 마음에 둔다면, 무리는 제자들이 아니고 무리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22절과 23절을 연결하는 말, “하시고, 또”가 영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리”는 제자들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제자가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라는 말은 그것을 언급합니다. 제자가 되려면, 세가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거나 인격을 부인한다거나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의 통제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즉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자신의 지정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두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입니다. 종종 이것을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끌어 안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자신의 고통이라기 보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준 목적에 헌신하는 것이 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석가래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 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십자가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각각에게 주신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수행하는데, 물론 고통이 수반되겠지만, 핵심은 그 사명의 완수일 것입니다.

세째, 예수님을 “따르는”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신 예를 언급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함께 사역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즉 제자들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는 일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사역하는 견습 도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랙 로리 목사님의 쓰신 믿는 사람과 제자의 차이를 적어 봅니다.

“모든 제자는 믿는 사람이지만, 모든 믿는 사람이 반드시 제자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 이상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믿는 사람은 편리할 때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제자는 결과에 상관없이 순종합니다.

믿는 사람은 한 번 결정합니다. 제자는 매일 결정합니다.

믿는 사람은영생(천국에 가는 것)에 집중합니다. 제자는 영원한 보상(천국을 가져오는 것)에 집중합니다.

믿는 사람은 일이 힘들 때 기도합니다. 제자는 상황에 상관없이 기도합니다.

믿는 사람은 교회를 참석해야 할 예배로 봅니다. 제자는 자신을 교회로 봅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 받은 삶을 삽니다. 제자는 부름 받은 삶을 삽니다.

믿는 사람은 천국을 만듭니다. 제자는 역사를 만듭니다.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합니다. 당신은 믿는 사람입니까 제자입니까? †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받는 세례

고린도전서 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

August 24, 2024. SaturDevo

이 구절은 여러가지 다양한 해석이 회자되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또는 “죽은 자를 대신하여”라는 의미인데, 죽은자를 위하여 세례를 주거나 받는 것은 기독교의 믿음과 합치되지 않을 뿐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도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단 종파의 하나인 몰몬교는 이 구절에 의거하여, 죽은 사람을 위하여 대신 그 친척이나 친구가 세례를 받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이 말을 이곳에서 쓰고 있을까하는 것을 의아해 하며, 바른 해석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여러가지 의견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이 구절이 들어있는 단락의 내용(Context)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부활이 분명이 있다’라는 것을 주장하는 가운데 나온 구절입니다. 세례를 어떻게 받아야 한다든가, 세례가 무엇이라든가 하는 주장이 아니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활이 있다는 것을 설득하는 가운데, 한 예로 들어 ‘죽은 자를 대신하여 받는 세례’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해석중 그럴듯한 세가지는 이런 해석입니다.

  1. 부활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바울은 당시 행해지던 풍습을 언급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즉 바울의 욧점은 죽은자를 대신해서 받는 세례가 아니라, 죽은 사람이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당시 오늘날 몰몬교인들 처럼, 죽은 사람을 위하여 어떤 사람이 대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은 그들을 예로 들어 부활이 없다면, 왜 그들이 그런일을 행하겠느냐고 묻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2. 바울이 말하는 ‘죽은자 (the dead)’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죄인이라는 의미라는 해석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몸은 아직 살아있는 듯 하지만,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된, 죽은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죽은 몸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아, 그 몸은 죽을 것이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새 몸을 입고 부활한다는 소망을 29절 처럼 표현했다라는 주장입니다.
  3. 또 다른 견해는 죽은자의 부활이 없다면, 죽어가는 또는 죽은 육체를 위한 세례는 쓸모없는 헛일이라고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 구절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부활이 분명히 있다는 주장이지, 어떤 세례가 합당한 세례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텍스트는 아직도 무엇이 정확한 의미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16도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은 최선을 다하여 이해 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할때, 우리는 기다리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믿어 집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당장 성경의 모든 것을 이 말씀은 이런 말이다라고 단정하여 해석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받게 하시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구원 받기에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아직도 분명한 의미를 모르는 것은 그냥 그런대로 받아들이면서 기다리며 공부하면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분명히 그 뜻을 이해하게 될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바울의 충고입니다.†